연이틀 영화를 보긴 처음이다. 여차하면 하루가 휙 지나간다. 일주일이 그랬고 한 달이 그러더니 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이 벽에 달랑 달려있다. 한 해 동안 무얼 했나 생각해도 뚜렷하게 떠오르는 일보다는 허전한 마음이 앞선다. 손가락 사이로 달아나는 시간의 헛헛함을 달래고 한해를 사느라 애쓴 내게 작은 이벤트라도 하고 싶어서 영화를 보게 되었다. 로맨스 영화
몇 해 전 겨울 휴식 겸 충전 겸 태국으로 여행 갔을 때의 일이다. 편리함의 장점 때문에 패키지여행을 택했다. 같이 온 일행 부부 중 한 부인은 호텔에서 묵고 나와 아침에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면 작은 배낭 외에 가방 하나를 더 챙겨 나왔다. 궁금증은 식사시간이 되면서 풀렸다. 부인은 남편이 식사할 때 가방에서 한국에서 챙겨 온 고추장이며 김치, 장아찌들을
영화관에 자주 가는 편인데 요즘 들어 뜸해졌다. 최근에 이렇다 할 히트작이 없어서일까? 그보다는 온 나라를 태풍처럼 강타한 ‘최순실 게이트’의 실상이 시시각각으로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펼쳐져서이다. 양파껍질은 하나씩 벗기다 보면 결국은 끝이 보이는데 이와는 달리 끝을 가늠할 수 없이 밝혀지는 사실들이 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여서 분노감과 비
노란 비늘처럼 쌓인 은행잎을 밟고 걷다가 고개를 들면 가시만 남은 고기처럼 나목들이 서 있다. 파란 하늘대신 바다가 일렁이고 파도 소리가 빈 가슴을 때리는 것만 같다. 만물이 소멸해 가는 이맘때는 그림자 속에도 허허로움과 적막감이 깃든다. 보내는 것과 맞이하는 것들 사이에 놓인 11월은 징검돌 같다.두툼한 옷들을 꺼내놓고 화분을 안으로 들여놓으며 저장 음식
여름엔 그러지 않았는데 가을에 들어오면서부터 자주 집 밖을 나가게 된다. 가을 추수처럼 햇볕이 무르익은 듯하고 거리도 겸손하게 가을을 맞이하는 듯하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인근 탄천을 자주 걷게 된다. 멀쑥하게 키 큰 갈대가 수줍게 흔들거리고 물가엔 백로와 청둥오리들이 삼삼오오 정겹다.그들을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뭔가 잘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남의 경험담을 듣는 것만으로도 내 삶에 밑거름이 될 때가 많다. 내 경험인 듯 남의 경험인 듯 헷갈릴 때가 특히 그러하다. A가 말했다. “요즘 부모 노릇 하기가 왜 이렇게 힘들지? 딸한테 정말 실망했어. 내 딸 맞나? 싶어” 듣고 나서 뜨악한 나에게 A가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외국에서 대학을 마친 딸은 귀국 후 좋은 직장에 취직했고 결혼도 시켰고 시가도
농촌에 사는 친구가 밤을 주워 가란다. 생각 없이 나섰는데 ‘알밤휴게소’가 있고 계속해 달리다 보니 벼 베기가 한창인 논들이 널려있다. 내 차 옆으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청년이 나란히 달리고 있었고 초등학교 4학년 가을 운동회가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그때 운동장 사열대 위에는 상품이 내 키만큼 쌓여있었지 아마. ‘賞’이라는 큰 글씨가 찍힌 두툼한 공책 묶음
이웃에 살면서 친하게 지냈던 부부가 새집을 지었단다. 장소를 물어보니 하늘이 높고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곳이라고 말했다. 진짜? 싶었지만 가보지는 못했다. 설마 그런 곳이 있으려고...경험담을 들어보니 과장은 아닌 듯하고 나 같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집을 짓는 동안 두 사람은 평생 안 해도 될 경험까지 했다고 했다. 부인은 암 수술까지 했고 인부들은 마
구월 들어서 경남 거제도에서 열린 ‘청마문학제’에 다녀왔다. 버스를 타고 택시로 갈아타고 한나절이나 걸린 긴 여행길이었다. 거제도는 포도의 마을이었다. 논에선 벼 대신 ‘둔덕 거봉 포도’라는 이 지역 특산물이 익어가고 있었고 햇볕은 그만큼 뜨거웠다. 거대한 파도 거품처럼 늘어선 비닐하우스보다는 맨땅이 보고 싶었지만, 이는 철없는 도시 사람의 사치일 뿐 비닐
매미들 합창에 귀뚜라미가 슬쩍 끼어드는 걸 보니 가을이 오기는 오는 모양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귀뚜라미를 촉직(促織) 이라고 불렀다. 날이 추워지니 빨리 베를 짜라고 재촉하듯 우는 벌레라는 뜻이란다. 그래선지 귀뚜라미 소리가 또렷해지면 마음이 서둘러지고 여름 내내 게을렀던 마음을 다잡게 된다. 책도 읽고 싶고 옷 정리도 하고, 생각도 깊어지고 손길까지 바빠
올해 여름은 얼음 넣은 커피를 달고 살았다. 커피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커피 말고는 폭염을 달래줄 마땅한 음료를 찾지 못해서였다. 덕분에 배탈이 난 적도 여러 번이었고 까닭 모를 냉병도 앓았었다. 그런데 며칠 사이 기온 차가 심해졌고 찬 음료보다는 따뜻한 음료로 손이 먼저 간다.지난 주말에는 지방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 오는 길에 문경새재에 다녀왔다. 예전에
낮에는 더워서 운동할 엄두를 못 냈다. 그래서 저녁이면 걷기로 체력을 다진다. 동네를 몇 바퀴 째 걷다 보니 한낮에 매미 울음소리가 불러온 그늘 때문인가. 어둠이 더 서늘해 보인다. 올여름은 매미 울음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매미의 일생을 생각해보면 울음소리가 더 애처롭게 들린다. 7년간 땅속 생활을 하고 고작 2주간의 바깥 생활로 일생을 마감하는 한시적 삶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는데 입술이 하얗고 윤기가 없었다. 맨 입술이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안부를 물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급히 오느라 립스틱을 바르지 못했다고 했다. 아무리 옷을 잘 입고 폼 나는 가방을 들었어도 입술에 생기가 없으면 허사다. 립스틱은 화장의 마무리로 정점을 찍는다.립스틱 색이 잘 어울릴 때 여자
장대비가 오는 날 도심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평소에 남편 일에 도움을 주는 고마운 부부를 초대해서 음식을 대접하러 가는 길이었다. 여름철 민어는 처진 기운을 회복시켜준다는 말이 있어서일까. 횟집에 도착해보니 손님들로 가득했다. 제철 맞은 민어는 가격도 비싼 편이었다. 우리도 큰 마음먹고 민어회를 주문했고 한 접시 나오는 도톰한 회에 군침이 돌았다. 천천히
“냉장고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 대형 TV 화면이 깨진다. 도끼와 전기톱으로 집안 구석구석을 닥치는 대로 부숴버린다.” 파열음에 공포감이 들다가도 묘한 후련함이 느껴진다. 남자 주인공은 무엇이든 파괴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부수면서 그 안에서 슬픔의 실마리가 풀리는 것처럼 집요하게 같은 일을 반복한다.최근 상영 중인 영화 〈데몰리션(Demolition)>
농촌여성신문에 ‘한상덕의 농담(農談)’을 연재하고 있는 한상덕 교수의 초대를 받아 경북 고령을 다녀왔다. 고령군과 매일신문이 공동 주최하고 한상덕 교수가 연출하는 ‘대가야 영화음악제’였다.막상 가보니 예전 고향 어르신들 잔칫날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 마을 스피커에서는 이장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었다. “잘 주무셨죠, 주민 여러분? 오늘은 평촌댁 할머니
제철 맞은 연꽃을 이번엔 꼭 봐야지, 하며 양수리를 찾았다. 물과 꽃의 정원인 ‘세미원’의 연꽃 군락지에는 물의 풍경이 덤으로 더해져 아름다움을 더했다. 몇 미터 앞에선 신비롭게만 보이던 연꽃이었는데 직접 만져보니 얇은 종이 느낌이다. 사람도 거리감이 있을 때가 좋은 건지.연꽃이 피어난 사이엔 돌다리가 있었다. 반대쪽에서 걸어오면 둘이 동시에 비껴갈 수 없
노안이 시작돼 어쩔 수 없이 안경을 맞춰야 했다. 그런데 안경을 쓰고 보니 보통 불편한 게 아니다. 자국이 남는 것도 신경이 쓰이고 더운 날엔 거추장스럽기까지 하다. 요즘 ‘라식’(각막의 표면을 벗겨낸 후 레이저로 시력 교정을 한 후 원래 상태로 접합하는 기술) 수술이 유행이란 말에 귀가 솔깃해진다. 눈이 밝아야 사물과 세상의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있을 테
모자와 헤어스타일은 그 사람의 첫인상을 좌우한다. 내겐 집에 있는 모자만 해도 많은데 자꾸 사들이게 된다. 배우도 아닌데 옷을 입고 거울 앞에서 모자를 써보면 마음에 쏙 드는 게 별로 없다. 여자들은 안다. 스카프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 자주 사고 모자도 많은 사람이 ‘깔 맞춤’과 구색 맞춤을 위해 또 산다는 것을.나는 야구를 좋아하지 않지만 캡 모자를
평일 한낮 밥집에 가보면 여자인 내가 봐도 여인천하처럼 보인다. 남자는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질 않는다. 남자들이 고생하며 돈 버는 시간에 팔자 좋은 여자들이라고 나까지 욕먹을까 두려울 정도다. 해서 낮 시간엔 밥집을 피하는 편이지만 그날은 피할 수 없는 모임이었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데 옆에 앉은 친구가 백화점 문화센터 강좌를 소개해주었다.‘